[월간노동법률 칼럼] 부모찬스와 문명국가

작성자
이동수
작성일
2022-05-25 08:33
조회
2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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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노동법률]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


왜 가난한 집 자식들만 사지로 몰리는가?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수많은 요인 중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운이다. 어느 나라, 어느 부모 밑에서 태어나느냐가 그 사람 인생의 거의 90%를 결정짓는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느냐,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느냐는 단지 명문대 진학이나 일자리만 결정짓는 게 아니다. 시대에 따라서는 생과 사를 가르기도 한다.

'사상의 은사' 고 리영희 교수는 자전적 에세이 <역정>에서 자신이 육군 통역장교로 참전했던 한국전쟁을 회고했다. 며칠 동안에도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치열한 전장, 그곳에서 그는 어느 날 땡볕에 새까맣게 그을린 보충병들을 향해 소리쳤다. "중학교 이상 다니던 사람 손 들어봐!"

그때 손을 든 사람은 100여 명 가운데 고작 3명뿐. 그는 그 모습을 보며 이렇게 탄식했다. "이 틀림없는 죽음의 계곡에는 못 배우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 나라의 불쌍한 자식들만 보내지는가."

20세기 세계 최강대국으로 우뚝 선 미국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매사추세츠공대(MIT) 크리스천 에피 교수에 따르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250만 명의 미군 중 80%는 노동자 또는 저소득층 집안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공장노동자, 트럭 운전사, 웨이터, 영세 상인, 광부, 농부의 자식들이었다. 1960년대 당시 미국에서 농촌 가정은 전체의 6%에 불과했지만, 참전군의 약 12%가 농촌 출신이었다. 마찬가지로 보스턴 내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인 도체스터에서는 베트남전쟁으로 42명이 전사했지만, 비슷한 규모의 인근 지역인 밀턴, 렉싱턴, 웰즐리는 세 지역을 다 합해도 전사자가 11명밖에 나오지 않았다(서울대 박태균 교수의 <베트남전쟁>에서 인용).

왜 가난한 집 자식들만 전쟁이라는 사지로 내몰리는가? 사실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래왔기 때문이다. 때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멋들어진 말로 장식되곤 하지만, 그것은 사회 최고위층이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보편적 의무를 수행하는 것에 대한 칭송이지 그들이 유달리 고된 의무를 감내한다는 뜻은 아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자녀를 더욱 안전한 환경에 놓이게 하고 싶고, 더 좋은 기회를 내어주고 싶은 부모 마음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앞선다. '부모찬스'는 그런 부모 마음이 사회적 규범을 벗어나고 타인의 권리를 해치는 선에 다다를 때 비로소 완성된다.

부모 마음과 부모찬스 사이


새 정부 장관 후보자 인선이 발표된 이후 부모찬스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호영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는 경북대병원 진료처장(부원장)·병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당시 딸과 아들이 경북대병원으로 편입학해 부모찬스 논란의 중심에 섰다. 후보자의 동료 교수들이 두 자녀 편입학 심사에 참여해 대부분 최고점을 준 점, 그의 아들이 저조한 연구 참여율에도 불구하고 석·박사들을 제치고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 논문 두 편에 이름을 올린 점들이 부모찬스를 의심케 한다. 김인철 교육부 장관 후보자는 본인이 한국풀브라이트 동문회장으로 있던 당시 딸이 높지 않은 졸업 학점에도 불구하고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돼 1억 원의 장학금을 받은 점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후보자는 자신이 근무하던 로펌에 딸이 인턴으로 근무했다는 점이 각각 도마 위에 올랐다. 후보자 개개인의 능력과는 별개로, 이들의 부모찬스 논란이 새 정부가 주장해 온 공정의 기치에 큰 상처를 입힌 것만은 분명하다.

부모찬스는 왜 나쁜가? 부모찬스가 비판받는 건 단지 자기 자식을 위해 남들은 누릴 수 없는 혜택을 선사하기 때문이 아니다. 사회지도층이 자신이 가진 사회적 자본을 자녀 앞길 터주는데 쓰는 만큼, 다른 누군가의 자녀는 그 기회를 박탈당한다. 그건 일종의 기회 약탈이다. 가뜩이나 실업과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며 계층 상승 이동의 기회가 사라지는 시대가 아닌가. 우리가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에게 분노한 것도, 조국 전 장관의 딸 조민 씨에게 분노한 것도 바로 이 지점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부모찬스는 그 자체로 사회의 역동성을 저해하고 발전을 가로막는다. 제아무리 노력해도 부모 잘 만난 금수저를 이길 수 없다면, 세상 그 누가 노력할 생각을 하겠나. 그런 사회에서 무기력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지는 임무나 수행하며 무사안일한 내일을 기원하는 것뿐이다. 근대 이전의 신분제 사회가 그랬다.

나는 문명화란 출생에 따른 격차를 줄여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더라도,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더라도 누구든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는 사회, 피부색이나 성별에 따라 차별받지 않고 자기 꿈을 펼칠 수 있는 사회. 그런 믿음을 준 것이야말로 현대 민주주의 국가들이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믿음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 자리를 사회지도층에 대한 불신과 절망이 채워나가고 있다. 없는 집 자식들은 도대체 누구에게 기대야 한단 말인가. 적어도 국가 자원을 배분하는 위정자들이라면 이와 같은 국민들의 물음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나라가 아직은 문명국가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