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칼럼] "대통령님 전광판 좀 봐주세요"

작성자
이동수
작성일
2022-08-12 18:10
조회
370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3/0003707838?sid=103

대선후보 때 “선수는 전광판 보지 않는다”고 한 尹 대통령
취임 후 “지지율 0% 나와도 바로잡을 건 바로잡겠다” 공언
반대해도 할 일은 한다는 소신도 좋지만 민심 무시하면 안돼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 중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경기장 선수는 전광판을 보지 않는다”이다. 대선 열기가 한창 고조되던 지난해 12월, 당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이준석 대표와 갈등을 겪어 20대 지지율이 계속 하락하자 여론조사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며 한 말이다. 대선이 100일도 안 남은 상황에서 나온 그 발언이 쪼들리는 마음을 감추기 위한 허장성세였는지, 아니면 흔들리지 않고 갈 길 가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국민의 마음을 얻지 않고는 이길 수 없는 선거에서 후보가 여론조사에 개의치 않겠다고 하니 쓴웃음이 나온 건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 윤 대통령을 보면 전광판을 보지 않겠다는 게 단순히 선거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나온 말실수는 아니었던 듯하다. 취임한 지 석 달도 안 돼 지지율이 30% 아래로 떨어졌지만 그 흔한 입장 표명이나 ‘특단 대책’ 같은 게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가 여론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자기 소신대로 밀어붙이는 걸 위정자의 덕목으로 여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설령 모든 국민이 등을 돌린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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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의 그런 시각은 얼마 전 보도된 기사에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 몇몇 여당 의원, 대통령실 및 정부 관계자 등과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지지율 0%, 1%가 나와도 바로잡아야 할 건 바로잡고 싶다”고 말했다는 내용이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지난 정부의 문제점을 열거하며 “반대 세력의 반발이 있겠지만 그대로 놔두고 갈 수는 없지 않겠느냐”며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 대통령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때론 여론의 거센 반대에도 맞설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연금 개혁이라든가 방사성폐기물 처분장(방폐장) 같은 혐오 시설 설치가 그렇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인기가 없다고 외면하면 나라가 골병든다. 그 피해는 결국 국민 몫이다. 지지율 떨어질 법한 일은 쉬쉬하면서 자기편이 열광할 만한 일만 골라서 하는 정치의 폐단을 그동안 숱하게 봐오지 않았나. 아마 윤 대통령이 꿈꾸고 있는 자아상은 이런 생각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현 상황을 오독(誤讀)해선 곤란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이후 그런 상황의 문제를 다룬 적이 없다. 원전 정책, 한미 관계 등에서 전 정권과 대비되는 행보를 보였을 뿐 딱히 국민적 반대를 무릅쓴 건 아니었다. 예비 학부모들의 공분을 산 ‘만 5세 초등학교 입학’도 국가적으로 필요한 사안인가 생각했을 때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그렇다면 결국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은 상황의 유불리에 따라 선택적으로 소통하고, 사적 인연으로 대통령실 인사들을 채우고, 뒤에서 당대표를 험담하다가 들통나서 벌어진 일 아닌가.

대통령이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대표”라고 한 메시지가 공개되었을 때, 야당은 국민의힘 내부 싸움에 대통령이 관여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보다 심각한 건 이준석 대표의 당원권 정지 이후 당이 잘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하는 대통령의 인식이다. 민심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이 상황에서 진정 당이 잘 돌아가고 있다고 느낀다면, 윤 대통령은 용산 밖의 민심을 전혀 모르고 있거나 대통령 앞에서 그저 아첨만 하는 간신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게 틀림없다.

제아무리 거대한 함선이라 할지라도 바다에선 한낱 점에 불과할 뿐이다. 권력도 다르지 않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윤석열호가 난파하지 않고 민심이라는 위대한 항로를 잘 헤쳐나가길 바란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대통령께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 제발 전광판 좀 보시라고, 민심의 경고를 무겁게 받아들이시라고 말이다.